"한국의 '미'로 세계와 소통하다"


명예교사 가구디자이너 하지훈 X 명예교사 한식푸드아티스트 이종국





2018 문화예술 명예교사, 어느 덧 마지막까지 달려왔습니다.


언제라도 여러분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될 특별한 하루 그 열다섯 번째 이야기

<한국의 '미'로 세계와 소통하다> 대담 및 강연이 11월 30일 금요일 오후 7시, 팔레 드 서울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국립 덴마크디자인 스쿨을 졸업하고 2009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오늘의 젊은예술가상(디자인)등 수상하며 현재 계원예술대학교 리빙디자인과 교수로 재직 중이신 가구디자이너 하지훈님.


그리고 2016 ’곳간by이종국미슐랭 가이드 서울편 2스타를 받고 2016 일 인사장관 만찬디너, 2017 포시즌스 호텔 세계미식여행 행사 등을 진행한 한식푸드아티스트 이종국님입니다.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하는 두 명예교사와 함께 한국의 맛과 멋으로 세계와 소통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는 특별한 하루입니다.

 

 



 

"음식과 가구가 묘하게 매치되는 부분이 있어서

오늘 특별한 하루는 재미있게 진행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훈)



"음식 속에 내가 감동할 수 있는 스토리와 사연들이 정말 많아요.

그 안에서 한국적인 것을 함께 찾아내요.”

(이종국)




이종국 명예교사는 멋진 우리 음식을 정형화된 형태로 고정하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메뉴판 앞에 다음과 같이 써 놓았습니다. 

"나는 그릇에 음식을 담지 않는다. 나의 철학을 담는다."

형태를 따라한다고 해서 음식이 가진 가치와 철학을 전부 다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치와 철학, 그리고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담아낼 때 멋있는 우리 음식이 탄생하고 이러한 가치가 음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녹아 나온다고 합니다.






"문화를 구성하는 것 중 하나는 밥상 문화입니다.

외국인들이 저희 집이나 가게를 방문했을 때

밥상이 20~30개씩 진열된 걸 보면

깜짝 놀라서 왜 그렇게 밥상이 많은 지 물어봅니다."


“여러 개의 밥상을 사용하는 것은 상대방을 대접해 주는 의미입니다.

단순히 같이 앉아서 같은 음식을 먹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밥상 하나하나 정성과 마음을 차려내어 대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이종국)




오랜 시간 전해져 내려온 한국의 밥상 문화를 들여다보면 상대방을 배려한 정성과 마음이 깃든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한편 전통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음식들이 많은데,  이런 소위 퓨전 음식에 대해 이종국 명예교사는 전통을 버리고 새롭게 창조해야만 퓨전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고 합니다.







밀가루만 먹으면 속이 아프다고 하신 분이 계셨어요

그래서 저는 만두를 만들 때 밀가루 대신 무를 사용했어요.

를 사서 얇게 민 만두피를 살짝 찝니다.

얇은 무 안에 속을 집어넣으니까 속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여서 너무 이쁜 거예요.


과연 이 '무만두'는 퓨전 음식일가요? 퓨전이 아니라 그냥 '무만두'일 뿐이죠.

음식은 우리가 가진 전통적인 개념에서 조금만 바꿔보면 얼마든지 멋있고 예쁜 걸 만들 수 있어요.”

(이종국)



  

음식에 대해 다채롭고 새로운 말씀을 전해 들으며 하지훈 명예교사는 세상에는 나쁜 재료가 없다, 나쁜 사용 방법만이 있다라며 똑같은 재료를 사용하더라도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모든 것이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국적인 것에서 많은 영감을 얻기 때문에 한국의 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해요."

(하지훈)




하지훈 명예교사는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것'에서부터 한국적인 작품을 만들게 되는 원동력과 모든 바탕이 형성된다고 말합니다. 근본 없이 시작하다보면 나중에는 작품에서 철학이 사라지고 예술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까지도 올 수 있습니다. 


하지훈 가구디자이너 님의 유학 시절 갔던 카피(Copy)‘라는 주제로 열렸던 전시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전시장에서 일렬로 나열되어있는 비슷한 모양의 의자들을 봤어요.

저는 처음에 놓인 명나라 시대의 의자는 오리지널인데

옆에 있는 의자들은 무슨 의미일까 생각했어요.

도슨트의 얘기를 전해 들으니 두 번째 놓인 의자는

첫 번째 의자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세 번째부터는 복제품이라고 했습니다.”


“새롭게 창조하지 않고 기존의 것을 그대로 가져온 의자는 어떨까요?

그냥 카피 제품입니다. 전통적인 것을 가지고 그 시대에 맞게

창조하지 않으면 작품이 아니라 복제품과 같은 꼴이 된다는 거죠.”

(하지훈)

 






시대에 맞게 꾸준히 작업하는 것이 왜 필요할까,

전통은 진부하게만 볼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관객과의 Q&A>



Q. 지금까지 만들었던 작품 중에서 딱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무엇을 고르실 건가요?


A. (이종국) 젊은 시절, 친한 친구가 사망했습니다. 그 친구는 언젠간 저에게 벤츠 자동차를 사주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어요. 친구가 떠나고 나서 저에게 사주겠다던 그 차를 샀어요. 그 차를 타고 전라도를 갔는데 열무가 아주 싱싱한 거예요. 그래서 열무와 함께 천 원짜리 칼을 사서 서울 올라오는 동안에 자동차 뒷자리에서 모두 다듬었어요. 갖고 오자마자 절여서 청양고추를 넣고 물김치를 담았어요. 친구를 그리워하고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 만들었던 그 김치가 가장 마음에 남습니다.


A. (하지훈) 제가 항상 변하지 않고 고르는 작품이 있어요. 덴마크에서 공부했을 때 마지막 졸업 작품입니다. 

방학 때 한국에 와서 응봉동 빗물 펌프장에서 등나무를 짜는 분에게 한 달 동안 빗자루질을 하며 등나무 짜는 기술을 배웠어요. 그 기술을 가지고 덴마크에 가서 의자를 만들었습니다. 등나무 짜는 기술을 접목한 이유는 서구에 있는 사람들이 한국의 문화를 저의 작품을 통해 경험해 볼 수 있게 하고 싶었거든요.





 

Q. 가구를 잘 사려면 어떻게 사야 하나요?


A. (하지훈오래 쓸 수 있는 가구를 사는 거죠. 하나씩 바꾼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이번에는 의자를 하나 사고, 몇 년 뒤에 돈을 모아 테이블을 하나 사고. 그런 과정이 빈티지가 되는 게 아닐까요? 

신의 취향을 꾸준히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꾸며가는 것이 저는 제일 좋은 가구를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Q. 대학교에서 주거환경 공부를 하는 학생입니다. 가구를 만들어서 판매하시는데, 판매가격을 정하게 되는 기준이 무엇인가요?


A. (하지훈) 원가계산을 하고 가격을 책정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해가치에 대한 것들은 그것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정하기 때문이죠. 사실 저도 그런 걸 되게 못해요.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다 보니까 나중에 제가 먹고사는 것들이 해결되는 상황이 오더라고요. 본질적으로 내가 만족할 수 있는 것을 하나씩 만들어나가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가치는 알아서 찾아온다고 생각해요.






 

Q. 제품디자인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품디자인을 하면서 점점 현대적으로 바꾸어 갈수록 전통이란 부분을 잃어버리게 될 때가 있어요. 전통을 가지고 가고 현대적으로 해석을 해야 이 시대에 맞춰갈 수 있을까요?


A. (하지훈작품을 예로 설명해 드릴게요. 제가 만든 작품 중 의자의 앉는 부분이 비정상적으로 더 길어서 신발을 벗고 앉을 수 있는 의자로 만든 것이 있어요. 바닥에 앉지 않고 의자에서 좌식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거죠. 너무 노골적으로 한국적인 것에 매몰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집에 소파가 있고 앞에 티 테이블이 있는데 밥을 먹으려면 본능적으로 소파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게 우리나라의 DNA라는 거죠. 모든 가구가 서구화되어있지만, 한국적인 것이 몸에 배어 있는 것을 사

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Q. 두 분이 생각하는 음식과 가구, 가구와 음식이 어떠한 연결성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A. (이종국가구와 음식은 친구죠. 어떤 셰프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좋은 그릇에 아름다운 음식을 먹고 싶은 게 로망일 거예요.


A. (하지훈저에게 전통 목가구 중에 아이템을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소반’ 이거든요. 굉장히 한국적인 특징을 많이 갖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보통 테이블이라는 것은 사람을 모이게 하는 역할을 갖고 있는데, 이건 자연스럽게 테이블이 사람한테 가게 만든 거죠. ‘공고상’이라고 해서 가운데 구멍이 뚫려있는 개창(開窓)이 있는데, 상을 가져갈 때 머리에 쓰고 있으면 시야를 가리지 않기 위해 구멍을 뚫어놓은 것입니다. 

왜 저런 형태가 나왔을까 고민해보면 그 형태 안에 명확한 답을 갖고 있다는 거죠. 한국적인 것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시각적인 요소들보다 그 안에 어떤 개념을 갖고 있는지 찾고 그것을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유학하실 때 덴마크라는 나라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A. (하지훈) 제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며 책을 보는데, 너무 아름다운 가구들에 이름이 쓰여 있고 괄호 안에 이라고 적혀 있는 거예요. 덴마크라는 표기가 되었는데 그것을 보고 마음의 울림이 느껴지면서 나의 성향과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든 것을 선택할 때 나의 시선으로 결정을 해야 한다 생각해요. 내가 나에게 맞고 나를 중심으로 놓고 모든 걸 생각했을 때 다가오는 것. 저에게는 덴마크였습니다.


 

Q. 이종국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좋은 그릇은 무엇인가요?


A. (이종국아무 생각 없이 만든 그릇은 쓸 수가 없어요. 만든 사람의 철학과 사용하는 사람을 위한 배려가 담겨있어야 하죠. 정말 좋은 그릇은 어디에 가져다 놔도 손이 가요. 그런 게 명품이 아닐까 싶어요.

 



 

전통적인 것, 현대적인 것 모두 우리가 우리 스스로 가치를 더 인정하는 마음가짐이 있으면 어떨까요?

보다 자세한 내용은 유튜브 영상(https://youtu.be/ba4VlW8VrEw)을 참고해주세요! 


문화예술 저명인사 또는 예술인이 명예교사가 되어 일반 시민과 직접 만나 문화예술을 깊이 이해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2018 문화예술 명예교사 <특별한 하루함께 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 인생을 변화시킬 특별한 순간, 문화예술 저명인사와의 특별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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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명예교사 사업 [특별한 하루]의 블로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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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울리는 진정한 소리꾼 박애리와 함께 떠나는

마음치유의 여정"


소리꾼 박애리 X 예술감독 원일






 

2018 문화예술 명예교사 <우리 음악, 마음을 잇다> 대담 및 강연이 1128일 수요일 오후 7, 광주 음악산업진흥센터 피크뮤직홀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번 문화예술 명예교사 <우리 음악, 마음을 잇다> 강연 및 대담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로 8회 남도민요경창대회 명창부 대상 대통령상과 2013 KBS 국악대상 대상 및 판소리상 등을 수상한 소리꾼 박애리님이 명예교사로 자리를 빛내주셨습니다.


또한, 대담자로서 2012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역임하고, 대종상 영화제 음악상 수상했으며,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음악감독을 하신 예술감독 원일님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소리꾼 박애리 명예교사는

급속하게 변해가는 빠른 시대에 가장 한국적인 것을 바탕으로

판소리의 가능성을 펼치고 있습니다."

(원일)




Q. (원일) 판소리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A. (박애리) 아버지께서 공무원이셨는데 7남매 중에 맏이셨어요. 집안이 넉넉하지 않아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지는 못했어요. 제가 어렸을 때 노래 부르는 걸 참 좋아했어요. 목포 시립 국악원에서 당시 2천 원이면 소리를 배울 수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거길 다닐 수 있게 하셨죠. 그곳에서 판소리에 매료가 되어, 9살 때 처음으로 소리를 배우게 되었어요.




 

Q. (원일) 판소리를 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A. (박애리) 사람의 목소리로 하는 일이잖아요. 어렸을 때는 목이 쉬었다가 풀렸다가 반복되는 과정을 겪으며 학습을 했는데 대학교 3학년 때 목이 잠기더니 한 달, 두 달, 반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소리를 하고 있지만, 고음이 나오지 않아서 음역 차제가 확 낮아졌죠. 그래서 목소리 자체가 굉장히 거칠어졌어요. 옛 명창들이 내 한계를 넘어서는 소리 연습을 하다가 목이 넘어갔다’, ‘목이 주저앉았다라고 이야기를 한다고 해요. 그런 시간이 2년이 넘게 지속됐죠

그때 지금은 돌아가신 박송희 선생님께서 제 목소리를 듣고 다 그럴 때가 오니 한 달, 두 달은 쉬어가도 괜찮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저는 그때까지 소리꾼은 쉬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한 달 동안을 가만히 쉬었어요. 그랬더니 목소리가 다시 나오고 꽉 잠겨있던 목이 풀려있더라고요.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보내면서 마냥 파고든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때론 멈춰서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도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어요.






 

Q. (원일) 오늘 이후에 박애리라는 판소리 예술가에게 기대할만한 일은 무엇인가요?


A. (박애리) 올겨울부터는 완창했던 소리를 중심으로 지금의 내 소리를 기록하기 위해 음반 작업을 해요. 향후 10년까지 적어도 현존하는 판소리를 가지고 하는 다섯마당의 완창 무대는 가져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래야 적어도 이 사람이 명창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가 하는 소리도 그림처럼 누군가에게 펼쳐 보일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그러기 위해선 내가 그 사람의 마음이 되고

감성을 이해해야 그것이 발현되죠.

인물이 처해있는 상황을 고스란히 느끼고 싶었던 것 같아요."

(박애리)





대담 중간에 박애리 명예교사의 공연이 진행되었습니다. 판소리를 통해 울고 웃으며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관객들은 박애리 명예교사의 표정, 몸짓, 소리를 따라가며 감동을 받았고 치진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었습니다.




    


 

 

Q. 팝핀현준은 판소리를 하는 박애리 명예교사에게 어떤 남편인가요?


A. (박애리) 용기를 주는 사람인 것 같아요. 서로 다른 일을 하지만 결국 하나로 통하는 거잖아요. 남편과 저는 서로에 대한 존경심이 자리 잡고 있어요

제가 불특정 다수가 보는 매체에 출연해도 괜찮을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예술가니까 할 수 있다고 말을 해줬어요. 이만큼 쌓아놓은 완성도 놓은 공연을 무너뜨리고 언제라도 다시 다른 공연을 만들 수 있는 게 예술가 아니냐고 말을 해주었죠. 그 말을 듣고 나 스스로 어느 정도의 틀 안에서 나를 가둬놓고 안주하려는 모습이 있었다는 생각을 깨닫게 되었어요. 끊임없이 예술가로서 저를 자극해주는 사람이에요.

 

 

  

Q. (원일) 요즘 젊은이들이 다양한 시도를 많이 하잖아요. 박애리 명예교사도 다양한 시도를 했던 경험이 있나요?


A. (박애리) 어렸을 때는 소리를 정말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밖에 못 했던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훌륭한 명창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꿈을 꿨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제가 소리를 하는데 관객들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야기가 잘 안 들린다,'라는 것이었죠. 너무나 함축적인 고어/한시 가사 때문이었죠. 그때 함께 공부하던 몇몇 소리꾼들이 아이들도 쉽게 알아듣고 따라부를 수 있는 창작 판소리를 만들어보자고 해서 시도하게 됐어요

저와 영화 <귀향>의 조정래 감독님, 최용석 대표님이 함께 <바닥소리>라는 팀을 만들었어요. 공연장에 와서 공연을 볼 수 있는 분들뿐만 아니라 공연장에 찾아올 수 없는 분들을 위해 우리가 찾아가는, 저 바닥에서 소리하는 사람이 되자는 의미였죠. 그렇게 창작 판소리 활동을 시작하면서, 제일 처음 만들었던 작품이 <토끼와 거북이>였어요.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하는 내용을 판소리로 만든 거죠.

 




 

 

"지난 4월에 완창 판소리 춘향가를 국립극장 무대에 올렸습니다

춘향가를 한 대목도 빼놓지 않고 전부 다 불렀더니 쉬는 시간 20분을 포함해서 여섯 시간 반이 걸리더라고요

그런데 관객분들도 두 시간짜리 영화 보는 것보다 더 짧게 느껴졌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Q. 완창 판소리를 하려면 어떤 준비가짐이 필요한가요?


A. (박애리) 사람들은 서 있기만 해도 힘든데 여섯 시간 동안 소리를 하는 것이 힘들지 않냐는 말을 많이 하세요. 여섯 시간 동안 완창을 하기 위해서는 평소보다 더 집중적인 연습 과정이 필요해요. 그래서 그런지 전 그날 완창무대를 하면서 그렇게 힘든 줄은 몰랐던 것 같아요.






 


<관객과의 Q&A>


Q. 오랫동안 한 분야에서 인정받아오기까지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었던 방법이나 비결이 있으신가요?


A. (박애리) 슬럼프는 한번 찾아오고 마는 것이 아닌 것 같아요.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소리가 나오지 않아 대학병원을 찾아갔어요. 목을 좋게 유지하려고 항상 노력하고 있는데 왜 이럴까 하며 하소연을 했죠

그랬더니 의사 선생님께서 이제 잘 나오지 않을 나이가 된 거라 말씀하시는 거예요.(웃음) 지금 나의 상태에 대해서 빨리 인정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 그 슬럼프를 극복할 방법이더라고요. 욕심내지 않고요.





"소리라는 게 무대에서 잠깐 보이는 것 이상으로

그 너머에 굉장히 특별한 세계가 자리하고 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많은 분들이 전통 판소리에 더욱더 매료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음악으로 내가 당신을 만났다.

오늘의 특별한 하루.

보다 자세한 내용은 유튜브 영상(https://youtu.be/dRY2XV_uuhQ)을 참고해주세요!


문화예술 저명인사 또는 예술인이 명예교사가 되어 일반 시민과 직접 만나 문화예술을 깊이 이해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2018 문화예술 명예교사 사업 <특별한 하루>는 또 다음 명예교사님을 모시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내 인생을 변화시킬 특별한 순간, 문화예술 저명인사와의 특별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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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명예교사 사업 [특별한 하루]의 블로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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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순간을 포착해

예술로 만드는 과정을 들어 보는 시간"


영상감독 이지송 X 일러스트레이터 밥장







2018 문화예술 명예교사 <여행의 기록, 예술이 되다> 대담 및 강연이 1123일 금요일 오후 7, 광주 음악산업진흥센터 피크뮤직홀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번 문화예술 명예교사 특별한 하루에서는 한국방송광고대상 최우수상 및 인기상을 수상하고 2012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단편영화<1/75‘>를 발표한 영상감독 이지송님이 명예교사로 자리를 빛내주셨습니다.


또한, 대담자로서 2009년 서울 디자인 올림픽 전시에 참여했고, <비정규 아티스트의 홀로그림> 개인전 개최, <나는 일러스트레이터다> 등의 책을 출간한 작가이자 여행가, 일러스트레이터 밥장님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광고에서 예술로, 평범한 직장인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나아간 두 분과 함께

여행 같은 오늘의 특별한 하루그 기록을 찾으러 떠나볼까요?

 





환갑이 넘은 나이에 혼자 세계여행을 하며 영상 신인 작가로 인생 2막을 알린 이지송 명예교사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담자 밥장은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인생 여행을 해왔습니다.





"오늘 특별한 하루는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될 거에요."

(이지송)








Q. (밥장감독님도 영상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여행이라고 들었어요.


A. (이지송) . 여행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영상에 대한 것들을 접목하게 되었고 광고가 갖고 있지 않던 매력의 영상을 작업하며 발견하게 되었죠. 광고는 남의 의도에 따라 내가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내 것을 하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저는 여행을 통해서 제 것을 찾은 것 같아요.



 

Q. (이지송) 최근에 이란을 다녀오셨다 들었는데, 계기는 무엇인가요?


A. (밥장) 저는 여행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 그것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방송작업인데요. 지금 하는 작업은 내년 5월에 방영될 다큐멘터리에요. 실크로드를 직접 가보고 이란, 인도, 중국을 여행하며 당시 문화들이 어떻게 우리나라까지 교류하게 되었는지 확인했어요.

 








"작년에 제가 그린 크리스마스 씰이에요.

소방관을 우리의 영웅이란 주제로 그렸어요."

(밥장)






 



"혼자 외롭게 여행을 한다는 것은

내 생각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이지송)






Q. (밥장) <여행은 혼자다>라고 하셨는데 여행을 주로 혼자 다니시나요?


A. (이지송) 저는 주로 혼자 다닙니다. 광고작업을 하면서도 여행을 혼자 많이 다녔어요. 일하는 동안 다녀온 여행은 일 때문에 간 출장이지, 순수한 여행이라고 할 수가 없었어요. 처음에는 혼자 다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차츰 여행은 혼자여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혼자 외롭게 여행을 한다는 것은 내 생각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여행을 하면서 나만의 생각에 빠져요. 그러다 보니 아주 엉뚱한 생각에 도달할 때가 많은데, 그 생각과 사물이 만났을 때 창조적인 작업이 나오게 된다고 생각해요.



이지송 명예교사는 해외를 여행하면서 찍은 작품들을 공개했습니다. 남들이 다 찍는 똑같은 사진, 영상을 찍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기 위해 노력한다고 합니다.  

스마트폰과 같은 간단한 장비로 달리는 버스, 돌아가는 세탁기 안을 찍은 평범한 일상을 그만의 특별한 시각과 의미 부여를 통해 새로운 예술로 창조해 내고 있었습니다.






"이란에 가서 본 모습을 사진 대신 모두 그림으로 그렸어요.

이렇게 남기니까 여행을 보는 또 하나의 시각이 되더라고요."

(밥장)




대담자 밥장의 여행에는 스마트폰 등 디지털 장비가 이닌 노트와 펜이라는 아날로그 장비가 함께 하는데요. 여행하면서 만난 장면, 순간, 감동을 그림으로 담아내는 작업을 하고 계셨습니다.  순간 순간의 그림을 주욱 이어보니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이 되어있었습니다.



 

<관객과의 Q&A>

 

 

Q. 중학교 2학년 학생입니다. 두 분의 학창시절은 어땠나요?


A. (이지송) 저는 한마디로 개판이었습니다.(웃음) 충실한 학생은 되지 못했어요. 만화를 그리는 것이 일과였고 학교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학생 중 한 명이었죠.


A. (밥장) 저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전교 1등 했었어요.(웃음) 어른이 되어 중학교 2학년 때 반에서 꼴찌였던 친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근데 그 친구가 성공한 CEO가 되어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 친구는 저를 고용했고 저에게 월급을 웠죠.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지금 학생들은 학교성적을 인생의 평가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인생 전반을 보면 그건 정말 일부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Q. 저의 인생 목표가 제 목소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내는 거예요. 두 분이 최종적으로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하는 뜻과 해주고 싶은 조언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A. (밥장) SNS에 보통 자기 가치관을 많이 쓰잖아요. 저는 중심 없는 삶이라고 썼어요. 보통 우리가 살면서 정확한 가치관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얘길 많이 하잖아요. 살다 보니까 오히려 빨리 변하는 사람들이 잘 살요.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화하다 보니 흐름에 맞춰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더라고요. 중심을 두는 삶은 오히려 변화를 두려워하고, 변하지 않겠다는 말이 될 수 있어서 '중심 없는 삶'이라고 적어놨어요. 저의 최종적인 꿈은 중심 없이 늘 변두리에서 꾸준히 사는 것입니다.


A. (이지송) 남과 다르게 살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우리나라 교육은 사람을 똑같이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죠. 작업하면서 난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봤을 때, 나는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내가 하는 것은 특별하다는 생각으로 나를 키우는데 노력했던 것 같아요

지금, 비로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니까 이것처럼 더 즐겁고 행복한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잘 되고 잘 안되는 일은 다음에 생각할 문제죠. 저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나이가 들 때까지도 몰랐던 것 같아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사랑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여러분들도 해보시고, 그 해답을 찾아보는 과정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Q.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은 학생입니다. 신인 시절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A. (밥장) 저는 그림을 35살에 시작을 했어요. 그때 친구들의 반응이 두 가지였어요

첫 번째는 되겠냐?는 말이었죠. 이렇게 부정적인 말을 여러분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해요. 그 이유가 뭐냐면 '내가 너를 잘 알아'라는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합니다

두 번째는 무관심이에요. 생각보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거든요. 그러하다 나중에 제가 그림을 잘 그리게 되니까 사람들의 반응이 자연스럽게 바뀌더라고요. ’넌 성공할 줄 알았다.‘, ’너는 유치원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라고요

사람들은 현재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 판단을 해요. 누구나 처음엔 서투른 시절이 있을 거예요. 그것을 극복하는 데에는 어떻게든 시간이 걸리니까 그 과정을 받아들이고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다만 그 과정에서 개인차는 존재하겠죠. 그걸 견디다 보면 신인 시절을 자연스럽게 빠져나오게 되는 거죠.

 



 

Q. 두분께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 이유가 여행이잖아요. 여행을 인생의 주제로 삼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A. (이지송) 10년 전에 산티아고 순례자 길을 걸었었어요. 800km32일 동안 걸었죠. 하루에 6~7시간씩 걸었었는데 아주 죽을 지경이었죠. 그 여행을 통해서 정말 이게 여행이란 걸 느꼈어요. 4명이 함께 갔지만 5~6시간을 걷다 보면 각자 자기 속도로 걷게 됩니다. 그래서 혼자 걷게 될 때가 많아요. 낯선 공간에서 낯선 사람과 새로운 풍경들을 만나면서 다음에는 혼자 여행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 경험이 지금까지 여행하게 해준 동기가 되었어요.


A. (밥장) 예전에 세계테마기행 <인도네시아 편>에 출연해 보르네오섬을 방문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곳을 가게 된 계기는 아시아에 사는 유일한 유인원인 오랑우탄이 살기 때문이에요. 우여곡절 끝에 오랑우탄을 만나게 되었는데, 암컷 오랑우탄이 저를 딱 잡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팔짱을 끼더니 저를 끌고 가서 한참을 계속 끌려다녔어요. 나중에는 관리인을 찾아서 구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어느 순간 저를 놓고 다시 돌아가더라고요

PD 입장에선 이것이 좋은 경험이었기 때문에 같은 경험을 하기 위해 나중에 또 다른 출연자와 인도네시아를 갔대요. 하지만 그 전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없었죠. 이런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표현을 해요. 나도 처음이고 감독님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런 행운을 얻었다는 거죠

보통 우리는 초심자라고 하면 위험하거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렇지만 여행을 가면 초심자의 입장으로 가기 때문에 얻어갈 수 있는 것들이 상당히 많아요. 여행에서 나를 초심자로 만드는 것이 행운을 많이 가져다준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어요.


 

  



여러분들은 삶에서 기억에 남은 여행지를 갖고 계시나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면이제라도 내 기억 속에 남는 여행지 한 곳을 찾는 기록을 찾아 나간다면 어떨까요?

그것이 또 다른 를 찾는 기행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똑같은 나라, 똑같은 여행지라도 지금 내 생각에 따라 다른 경험과 다른 이야기를 얻어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시선을 배워볼 수 있었던 시간.

오늘의 특별한 하루.

보다 자세한 내용은 유튜브 영상(https://youtu.be/JRiJzfdAWIE)을 참고해주세요!

 

문화예술 저명인사 또는 예술인이 명예교사가 되어 일반 시민과 직접 만나 문화예술을 깊이 이해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2018 문화예술 명예교사 사업 <특별한 하루>는 또 다음 명예교사님을 모시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내 인생을 변화시킬 특별한 순간, 문화예술 저명인사와의 특별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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