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파편 : 「임꺽정」연재 시, 사용했던 펜촉


「임꺽정」이 연재 1000회가 되었을 무렵, 허영만이가 내게 그럽디다.

'형은 왜 그리 굼떠요? 임꺽정이가 아직도 도적이 안 됐더만.'


한 사람의 몇 십년 인생을 하루 아침에 그려낼 수는 없는 일이지요.

작은 선들이 모여 표정이 되고 주름이 되듯, 

5년 넘게 수 천개의 펜촉이 쌓여 임꺽정의 인생이 되고, 저의 만화가 되었습니다.


끈기는 이 펜촉을 모으는 데 필요했던 게 아니고

수 만 페이지에 선을 입혀, 삶의 결로 다듬어 내는데 필요했던 게지요.



아직 못 다한 이야기



2013년의 첫 눈이 내리던 날 오후.

군자동의 작업실에서 명예교사 이두호 만화가 선생님을 만나뵈었습니다.



선생님은 정말 따뜻하고 인자하신 아빠미소로 저희를 맞아주셨어요.

감히 별명을 하나 붙여드린다면, '미소천사'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예요.

아빠마음으로, 감도 호두도 주스도 살뜰히 챙겨주신 덕분에,

저희는 정말 외갓집에 놀러간 듯한 푸근한 기분으로 인터뷰를 할 수 있었어요.



사실 인터뷰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저희는 600살 먹은 머털이 이야기를 실컷 듣고,

또 조선시대부터 70년대 만화계의 이야기에 넋이 나갔다가,

또 선생님의 귀중한 손 그림들도 직접 구경하느라 바빴답니다.

하핫^^: 직무 유기인가요?



'「째마리」를 연재할 무렵에, 그 책이 '유해도서'라고 경찰청에 불려간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뭐가 유해하다는 거냐, 내 만화가- 하고 따져물으니깐

포졸들이 주인공한테 창을 겨누는 장면을 펼치면서,

왜 다리 한복판에 가랑이에다가 창을 겨누느냐는 거예요. 허허허.

지금이야 웃지만 그때는 정말 화나고 열받는 일이죠, 그게.

뭐, 그 때는 그런 시기였으니깐.. _ 명예교사 '이두호' 만화가



' 「째마리」다음이 이제「임꺽정」인데, 「임꺽정」을 연재할 때 쓴 펜촉들을 제가 모아뒀어요.

매일 매일 하루에 4P씩 연재하는데, 펜촉을 꼬박 두 개씩 썼어요.

5년 2개월을 연재했으니까, 수 천개는 되겠지요.

제가 원래 펜 터치가 빠르고 강약이 심해요. 그러니까 펜촉의 탄력이 금방 없어져서.

그래서 제가 쓰던걸 만화가 이희재가 탐을 냈어요. 그 친구는 선이 굵직하거든.

근데 이제는 뭐, 아련한 얘기지. 요즘엔 만화가들이 펜촉을 안 쓰니까 펜촉 생산도 안 하거든.

아쉬워할 것은 없다고 봐요. 펜이 나왔을 때, 붓이 외면당했던 것과 같은 이치니까는. '

_ 명예교사 '이두호' 만화가


참! 저 펜촉들 왼편에 나란히 놓인 돌멩이들은

이두호 선생님께서 직접 순국비며 왕릉에 다녀오시면서 하나씩 가져오신 돌들이에요.

선생님 작업실을 둘러보다 놀라웠던 것이, 만화책보다 역사책이 더 많았던 점인데요,

세종대왕 얼굴의 주름하나, 명성황후 머리에 가채를 하나 그려도

철저하게 고증을 통해 그려넣으실 정도니 말 다했죠.


  


「임꺽정」,「덩더쿵」을 비롯해 선생님의 많은 작품들이 프랑스에서 번역출간 되었는데요,

재밌는 것은 한국어로 된 의성어나 의태어 표기를 그대로 둔 점이에요.

위 사진에 보이시죠? '쏴아아아'라던지 '퍽', '후다닥' 이런 한글들이 고스란히 번역본에 실려있어요.


'프랑스 사람들은 이런 글자까지도 그림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래요.

어느 귀퉁이 한 부분을 조금만 손봐도 꼬박 꼬박 연락해서 물어보거든요.

내 책이 외국으로 번역되고 나서, 나는 더 욕심을 갖게 되었어요.

우리 후배들은, 지금 젊은 후배들은 더 멀리, 더 높이 뻗어나가야 한다,

한국의 만화가 어느 수준인지, 본 때를 보여주자. 그런 욕심.'

_ 명예교사 '이두호' 만화가



'가장 한국적인 만화가'

이두호 선생님 앞에 항상 붙는 수식어인데요,

오늘 선생님을 뵙고 나니, 이 수식어가 더 정감어리게 다가옵니다.


그것은 아마도,

한국 만화의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 달려와, 후배들에게 미래를 건네주는 입장에서

선생님이 느끼셨을 고민과 걱정이 마음으로 전해져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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